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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귀포에서 엿들은 ‘슬로시티’ 담론
2020년 05월 21일(목) 17:53
오월 중순의 제주도는 어디를 가나 밀감 꽃향기로 코끝이 상쾌하고 감미롭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출구에서 발열체크뿐 아니라 축산 방역 소독 등으로 조금 살벌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공항 밖으로 나가면 제주 섬은 한가롭다. 연간 1500만 명이 밀려들어 과잉관광의 상징이 됐던 섬이 이렇게 조용해진 것은 코로나19의 폐해로 봐야 할까, 아니면 덕택으로 봐야 할까.

비교적 평탄하면서도 해변이 아기자기한 올레 4코스에는 단체관광객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가끔 혼자 또는 커플이 걸어가는 풍경만 볼 수 있었다. 표선 백사장에서 남원포구까지 18㎞를 걷는 동안 50명도 못 본 것 같다. 카페도 음식점도 낮잠 자고 있었다. 코로나19 충격에 주저앉은 제주 관광산업의 충격을 실감했다.

우연찮게 알음알음해서 만난 여남은 명이 서귀포 시내에 있는 ‘올레센터’에서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대표 서명숙)의 총본산인 이곳은 1층 홀이 카페 겸 음식점인데, 고객이 거의 없었다. 화제는 ‘올레 이야기’ ‘제주관광경기’ ‘서귀포추억담’ 등이었다. 제주 토박이도 있었지만 이주민으로서 서귀포에서 사업하는 사람도 여럿 섞여 있었다.

대화 중에 ‘슬로시티’(slow-city) 얘기가 나왔다. 해외생활도 꽤 많이 했다는 육지 출신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서귀포를 ‘슬로시티’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슬로시티로서의 서귀포 매력을 설명하더니 올레센터 앞 찻길을 ‘자동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그는 또 한라산 1700고지를 관통해서 제주 섬을 동서 해안으로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면 백록담 보전에도 좋을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슬로시티’ 아이디어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전직 신문기자 출신 토박이 한 사람이 ‘차 없는 거리’ 아이디어가 섣부르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곳에서 올레꾼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은 차 없는 거리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토박이 주민 입장은 다를 겁니다. 주민의 편의를 위한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관념적으로 좋아 보인다고 섣불리 추진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맥주잔을 부딪치며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는 이들 두 사람의 대화에서 문득 제주도가 가진 두 가지 문제점이 떠올랐다. 급격한 세계화에 휩쓸려 제주의 자연환경이 감당하기 힘든 과잉관광(over-tourism)이 첫 번째 문제고, 급격한 인구변화에서 불거지는 이주민과 토착민의 정서적 괴리가 두 번째 문제다. 이 두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것이 어쩌면 제주도의 미래를 결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슬로시티 아이디어는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슬로시티’ 개념은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카를로 페트리니가 주창한 ‘슬로푸드’(slow-food) 운동이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페트리니는 당시 로마의 명소에 미국의 맥도날드, 즉 패스트푸드(fast-food)가 진출하는 것에 반대하며 지역 전통의 음식을 먹자는 슬로푸드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이 발단이 되어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는 도시운동이 일어났고, 1999년 '치타슬로'(Cittaslow)라는 국제단체가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고 전 세계로 회원도시를 확대해나갔다. 한국에도 전주의 한옥마을 등 여러 지방도시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슬로시티 개념은 쉽게 풀어보면 기술문명에 의해 세계화, 규격화, 가속화가 진행되는 대도시형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느린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쾌적하고 한가하게 살자는 것이다. 즉 소음과 교통체증이 없고 지역 음식을 먹으며 자연과 전통과 조화를 이루며 느리게 사는 ‘도시 생활 가꾸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 전만 해도 제주도는 1차산업 의존도가 높은 슬로시티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2010년을 전후해 국제자유도시정책을 추진하고 중국관광객이 몰려오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변했다. 관광특수를 노린 투기가 벌어졌고, 천혜의 해변과 한라산 능선을 따라 관광시설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는 난개발이 일어났다. 10년 동안 인구가 55만 명에서 70만 명, 즉 27%나 늘었다. 하루 쏟아져 들어오는 4만 명의 관광객을 포함하면 제주도는 사실상 인구 80만 명의 핫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쓰레기는 쌓이고 처리되지 않는 하수가 바다를 오염시키고 범죄는 폭증했다.

늘어난 인구 중에는 게스트하우스 사장처럼 슬로시티 개념을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날그날 돈벌이가 잘되면 좋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제주 토박이 주민들도 강남스타일의 부동산 붐이 일어나면서 삶의 방식과 속도가 서울을 닮아버린 경우가 많다. 개발을 좋아하는 토착민과 환경보전을 원하는 토착민, 그리고 관광 개발붐을 타고 몰려든 이주민과 자연환경에 어울려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이주민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코로나19의 충격으로 제주도 관광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관광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력산업인 농업도 관광업 침체와 학교 급식 중단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그 전과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느냐는 제주도에 사는 주민들과 지역 여론 주도세력의 성찰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제주도에는 이주민의 목소리가 높아진 마을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인구 구성으로 볼 때 이제 이주민은 무시할 수 없는 주민 그룹이다.

슬로시티는 제주도의 이상적인 방향일 수도 있지만 생계에 걱정 없이 도시적 소비를 하면서 자연을 즐기려는 이주민들의 생각만으론 실현할 수 없는 목표다. 토착민과 이주민의 상호 호응하며 가꿀 때 가능하다. 모두가 행복해야지 한쪽만 행복하면 좋은 공동체라고 볼 수 없고 또 지속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김수종 / 뉴스1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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