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학점, 취업 걸림돌"…대학가 '학점포기제' 요구 재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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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낮은 학점, 취업 걸림돌"…대학가 '학점포기제' 요구 재확산

연세대 등 총학생회 주도로 도입 촉구
고용·진학 경쟁 격화에 성적 부담 커져

취업과 진학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낮은 성적을 삭제할 수 있는 '학점포기제' 도입 요구가 다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단순한 성적 정정 제도를 넘어 치열한 채용 시장에서 불리함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30일 뉴시스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한국외대 등 주요 대학 총학생회가 학점포기제 도입을 학교 측에 공식 요구했고, 일부 학교는 검토에 나섰다.
이화여대 총학생회 '스텝업'은 이달 학점포기제를 상정한 이화 5대 요구안을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 측은 "요구안을 접수했으며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강대 총학생회 '나루'는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학점 포기제 도입을 위한 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여 약 1900명의 서명을 모았다. 총학생회는 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요구서를 총장 측에 전달할 계획이다.
연세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3월 교학협의회에서 학점포기제를 안건으로 상정했다.
한국외대 총학생회 역시 올해 공약 중 하나로 학점포기제를 내세웠다. 나민석 한국외대 총학생회장(정치외교학과 22학번)씨는 "학점포기제는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양대는 2014년 폐지했던 학점포기제를 2025학년도부터 재시행한다. 고려대는 지난해부터 필수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최대 6학점까지 포기를 허용하고 있다. 경희대, 건국대, 숙명여대, 숭실대, 동국대, 아주대, 홍익대 등도 이미 학점포기제를 운영 중이다.

◆"낙제 한 과목이 당락 가른다"…청년층 학점 압박 가중

학점포기제는 교과목 성적이 확정된 뒤 취득한 성적을 학생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서 운영되다가 '학점 세탁', '성적 인플레이션' 논란이 일자 2014년부터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이후 취업난이 심화되자 학생들이 학점 포기제를 다시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청년층 고용률은 2023년 46.5%에서 2024년 46.1%로 하락했고, 지난 3월 기준으로는 44.5%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월 대비 1.4%포인트 떨어진 수치로, 같은달 기준으로는 2021년(43.3%) 이후 최저치다.
경기 위축과 기업의 채용 축소로 대학생들 사이에선 "학점 하나로 당락이 갈린다"는 위기감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하반기 취업한 고혜진(27·여)씨는 "요즘은 모든 학년, 전과목 성적을 요구하는 기업이 많다"며 "낙제를 지울 수 있다면 진로에 맞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진학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학점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과 대학원 입시에서 핵심 평가 기준이다. 2025학년도 법학적성시험(LEET)은 약 1만 9400명이 지원해 평균 10 대 1 경쟁률을 기록했고,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진학자도 2020년 24만1650명에서 2023년 25만518명으로 증가하는 등 경쟁도 치열하다.
로스쿨 재학생 정모(27)씨는 "로스쿨 진학 과정에서 학점 때문에 시도조차 못 하고 포기한 친구들을 많이 봤다"며 "학점을 짜게 주는 과나 학교일 경우 진입장벽이 훨씬 높아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학점포기제를 재도입한 한양대의 로스쿨 관련 게시판에서는 "학점포기제도를 활용해도 입시 불이익이 있는지"라고 묻는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좋은 일자리 적고 평가 기준은 정량"…전문가들 구조 문제 지적

전문가들은 학점 경쟁이 치열해진 원인으로 채용 구조의 변화를 지목한다.
이종선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좋은 일자리는 줄고, 서류 경쟁은 심해지면서 학점이 가장 손쉽게 동원되는 선별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려는 청년층이 학점에 더 집착하게 되는 구조적 배경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상위 10~20% 일자리에만 쏠리는 구조가 청년 간 경쟁을 자극한다"라며 "외형적 스펙보다 동기와 경험 등 개인 서사를 평가하는 ‘좋은 채용’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학점포기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동국대 재학생 김채연(25·여) 씨는 "코로나 시기 이후 성적 구조가 느슨해졌는데, 학점포기제까지 확대되면 학업에 대한 긴장감이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둔 우정연(25·여)씨는 "모두가 상향 평준화되는 상황에서 학점 외 활동의 평가가 더 중요해지면 공과대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대학들도 학점포기제 도입을 두고 고심하는 모양새다. 이화여대 교무처장은 최근 교내 학보를 통해 "무분별한 학점포기제 도입은 학점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도입 여부보다는 학생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방향을 잡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도 "해외 대학 중 학점포기제를 운영하는 곳은 없다"며 "재수강을 통해 개선하는 방식이 교육적으로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김희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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